우리 안에 있는 죄인은, 하느님의 사랑이 어떤 목적을 지니는지 의인보다 더 잘 이해한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세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의인을 부끄럽게 하고, 자캐오처럼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준다(루카 19,8 참조)《자기 자신 잘 대하기》, 167면
안젤름 그륀 신부는 “우리 안에 있는 죄인”(167면)에 대하여 본인의 경험담과 실제로 있었던 사례를 전해준다. 그리스·로마 신화 이야기도 들려주는데, 영성 서적이면서도 현대 심리학의 논의를 적극적으로 가져와서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글 속에는 나의 일상과 다름없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기에, 읽다 보면 내 안의 헝클어진 면들과 마주하게 된다. ‘대체 난 어째서 이런 식으로 못살게 구는 걸까?’ 의구심을 가졌던 일들에 대해 수긍이 가는 요인을 알게 되고 조금은 가벼워진다. 자신에게 날카롭게 대하는 데에는 자기 사랑의 부족에서 오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한두 번에 그치지 않고 숱하게 반복되면서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책의 전반부에는 자신을 잘 대하지 못하는 모습과 이유를 다룬다면, 후반부에서는 여러 상황에서 자비로울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기술한다. 앞부분을 읽다가 ‘그러면 어떻게 잘 대할 수 있지?’라는 궁금증이 생기면 뒷장으로 가서 눈길이 가는 대목을 읽었다. 평소에 정리 정돈을 잘하지 못하는 것이 갑갑했는데, ‘사물을 잘 대하기’라는 장에서 그러한 행동에 담긴 심리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한편,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하느님을 대하는 관점과도 연결되었다. 개인의 자화상은 하느님 상과 관련이 깊은 것이다. 주님을 엄숙하고 벌하는 분으로 여기며 먼발치서 거리를 두고 있는지, 아니면 용서하며 품어주시는 분으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시선은 자신의 실수를 대하는 태도와도 긴밀히 연관을 맺는다. 주님께서 이미 용서하신 일에 대해 계속해서 스스로 미워하고 탓하고 있다면, 이는 겸손이 아니라 단죄하는 악습에 빠진 일일 수도 있다. 나무라며 채근할 것인지, 잠시 숨을 고르고 받아들일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저자는 개인이 지닌 죄의 면모는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밝힌다. 의인보다도 죄인이 하느님 사랑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때로 나는 내 말이 옳다고 확신했다가 이내 곧 맞지 않았음을 부끄럽게 알 때가 있다. 다른 이와의 관계에서도 나타나지만, 나 자신의 내면에서 흔히 드러난다. 안젤름 그륀 신부는 다른 이와의 관계 못지않게, 스스로와 안녕히 지내고 있는지를 묻는다. 내 안에 있는 나약함을 피하지 않고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전보다는 화를 덜 내고 낙담이 줄어들지 모를 일이다. 인간은 동일한 잘못을 반복해서 저지른다. 사람인지라 같은 실수를 재차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를 통제하겠다는 접근으로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질타하기 쉽다. 홀로는 변화시킬 힘이 부족함을 인정하고 변화의 주도권을 하느님께로 드릴 수 있다면 어떠할까. 당장에 나아짐이 없을지라도 ‘지금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때가 아닌가 보다’라며 조금은 더 여유 있게 되지 않을까.
하루를 지내면서 숱하게 나와 타인을 내 뜻대로 하려 할지라도, 정도가 지나쳐서 악하다고 여겨질 때는 멈출 지혜가 필요하다. 《자기 자신 잘 대하기》는 여태까지 이해하지 못했던 측면을 들여다보게 해주고 화해할 수 있도록 여지를 열어 준다. “예수님의 말씀도 우리 자신을 잘 대하라고 초대”(195면)하고 계신다. 자신을 한쪽으로 모는 경향에 주의를 기울이고, 하느님께 공간을 더 내어 드릴 수 있다면, 그곳에 평화가 깃들 여지가 더 커지지 않을까 싶다. 내 안의 모순적이고 부끄러운 면모를 마주할 때면, 거부하거나 거칠게 대하기보다는 인정하며 가까이 지낼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